오디오북

Audio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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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디오북’은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책이나 글귀를 낭독합니다.
  • 다양한 분야의 낭독자가 새로운 이웃으로 참여합니다.
  • ‘오디오북’ 콘텐츠는 2주에 한 번씩 게시됩니다.
  • ‘Audiobook’ reads out the books or quotes that we would like to share with neighbors.
  • Readers from different fields will participate as the new neighbors.
  • ‘Audiobook’ content is uploaded every two weeks.

〈 2200년 물의 얼굴 〉

“Shape of Water, Year 2200”

〈2200년 물의 얼굴〉은 바깥에서 즐기는 아르코미술관의 일환으로 진행된 교육 프로그램이다. 5인의 아트토크 참여 에듀케이터와 작가 무진형제가 함께 ‘물의 얼굴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환경, 생태계와 연결하는 예술경험 방법을 연구하였다.

이번 오디오북에서 에듀케이터 이지연은 예술교육가의 관점에서 예술이 환경문제를 어떻게 접근할 수 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이어서 프로그램의 협력 기획자로 참여한 작가 무진형제가의식 속에서 삭제된 물의 형태, 색체, 향을 형상화한다.

글, 낭독: 이지연 에듀케이터, 무진형제

“바깥에서 즐기는 아르코미술”관 온라인 자료집

“Shape of Water, Year 2200” was one of the public program organized as Outdoor ARKO Art Center to connect with larger audiences. This series of workshops and mentoring program offering an opportunity to contemplate artistic practices that has a meaningful impact on environment and ecology through ‘the embodiment of water’.

For this audiobook, educator Jiyun Lee questions artistic methodology approaching environment issue from an art educator’s perspective. Later artist group Moojin Brothers envisions the form, color and odor of water which has been forgotten from our conscious.

Text and Reading: Jihyun Lee (educator), Moojin Brothers (artist group)

어린이가 현대미술관에 가지 않으면 미술관은 망할까?

If children don’t go to contemporary art museum, will museums go under?

이 낭독은 독립 큐레이터 조은비가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으로부터 의뢰받은 원고의 마지막 단락을 읽은 것이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은 일종의 구독형 영상작품 스트리밍 플랫폼을 구축하였고, 이 온라인 플랫폼 경험을 둘러싼 개인적인 감상을 60매 분량의 일기로 써주길 요청했다. 조은비는 이 에세이에서 온라인을 통해 작품을 관람하는 전시/경험과 자신이 처한 양육과 돌봄의 상황을 연결시킨다.

텍스트/목소리: 조은비(독립 큐레이터)
이 글의 원문은 이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스크립트:

(중략)

지난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위치한 마우리츠하위스 미술관에서 마주친 헤라르트 테르 보르흐의 〈아이의 머리를 빗는 어머니〉(1952-53)에는 엄마가 어린아이의 머리를 빗겨주는 모습이 담겨 있다. 그러나 미술관에서 이 평온한 실내 풍경화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분명 많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이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1665) 바로 왼편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명화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둘러싸여 바로 옆에 있는 이 작품은 제대로 보기 힘들뿐더러, 관객들의 주의 깊은 눈길을 받기엔 아무래도 어려운 처지다. 나는 이런 배치가 꽤나 얄궂다고 생각하면서, 우연히 만난 이 외면 받은 작품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와 사진을 찍으려는 관객들로부터 비켜줄 수 있냐는 핀잔을 간간이 들어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넷플릭스식의 플랫폼에선 이러한 만남의 가능성마저 차단될 것이란 점에서, 아이의 머리를 빗는 어머니가 앞으로 맞게 될 운명은 더욱 가혹할지 모른다.

분명 관객이 제시된 ‘시스템’ 안에서만 미술을 경험하게 된다면 개별적인 맥락화의 가능성은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다. 가이던스에 따라서 콘텐츠에 도달하는 제도적인 길에 ‘옆’ 길이란 없다. 그리고 이 직선의 답답함은 플랫폼에서 작품을 보는 내 조건에도 영향을 미친다. 나에게 주어진 ‘스크롤’의 권능이 작품에 대한 무례일지 모른단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는 곧잘 원하는 시점으로 이동하기 위해 스크롤 바를 재차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이 스크롤의 감각에 익숙해져, 내가 시간을 적절하게 조정하고 있단 착각마저 들었다. 어쩔 수 없이 스크린을 봐야만 하는 극장의 블랙박스가 아니라면, 나는 지나치게 산만한 관객이 되고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느 한편으론 작가가 획정한 시간성을 깨뜨릴 수 있단 이 힘이 내게 모종의 불편한 감정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건 작품의 온전한 감상이 온전히 내 책임하에 있단 사실에서 비롯한 어떤 부담감이었다. 그 개별적인 시간의 흐름이 내 손끝에 달렸다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이 감정은 새로운 경험을 이끌기도 했다. 즉 그 아이러니한 자율성에도 불구하고, 제작자의 의도에 순순히 따르게끔 만드는 작품을 만나기도 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항복선언이었다. ‘나는 스크롤을 반납한다.’ 게다가 한번으론 아쉬워 나는 그 작품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감상했고, 이는-제도가 끝내 틈입할 수 없는-작업이 가진 고유의 힘을 발견하는 새로운 방식으로 여겨졌다. 이와 같이 온라인 플랫폼은 어떤 상황에 조건 지어진 어떤 ‘시민’에게 하나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미술관의 온라인으로의 ‘이주’가 팬데믹에 대한 손쉬운 반응에 머물러선 곤란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대안적인 접근은 미술관 제도가 예술가와 관객 그 사이의 어떤 긴장 관계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 미술관이 그 미래를 상상하는 데 있어, 그간 누락시키고 배제해왔던 것을 포괄하는 것이 최우선이란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어느 재벌 기업가가 사후 미술관에 기증한 소장품의 전시가 이 팬데믹 상황에서도 연일 흥행하고 있다는 작금의 사실은 다소 의미심장하다. 관람 예약은 이미 한 달 전에 마감되었고, 이는 한국 미술을 애호하는 잠재된 관객들을 새삼 발견하게 한다. 하지만 이 아이러니한 풍경 앞에서 나는 이렇게 되묻고 싶다. 어린이가 현대미술관에 가지 않으면 미술관은 망할까? 물론 안 망할 것이다. 미술관에 외국작가가 없다면 망할까? 아주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술관에 이건희가 없으면 망할까? 아마도 망할 것이다. 이 문답은 우리가 지금부터 새롭게 상상할 미술관에 의해 ‘다시’ 쓰여야할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이며 공통의 경험은 무엇인가. 누구여야 하며 무엇이어야 하는가

This is the voice of independent curator Eunbi Jo who reads out the last paragraph of her text commissioned by the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Korea. The museum has recently built a subscription-type streaming video work platform and asked her to write a 60-page diary about personal impressions surrounding this online platform experience. In this essay, Eunbi Jo connects the exhibition/experience of viewing works online with her own situation of nurturing and caring.

Text/Voice: Eunbi Jo (Independent Curator)
*The original text of this essay can be found at this link.



Script:



Last year, I encountered Gerard ter Borch's Mother Combing Her Child's Hair (1652-1653) at Mauritshuis Museum in The Hague. But it’s clear that few people in the museum will pay much attention to this painting and its tranquil indoor scene. That’s because it hangs immediately to the left of Johannes Vermeer’s Girl with a Pearl Earring (1655). Located just next to the famous painting and surrounded by people crowding in to get a glimpse of the latter, this work is not only hard to see properly but in a situation where it can hardly expect close attention from viewers. I stood in front of the dismissed work for some time, thinking how perverse its location was. All the while, viewers were telling me to get out of the way so that they could take photos with the girl with the pearl earring. But given that platforms like Netflix preclude even the possibility of such an encounter, the fate awaiting the mother combing her child’s hair may be even harsher.

Of course, experiencing art only within a “system” that posits the existence of viewers will markedly reduce the possibility of individual contextualization. On the institutional path that delivers us to content in accordance with guidance provided, there are no “side” streets. And this linear frustration also affects my condition when viewing works on platforms. Despite the thought that the power of “scrolling” bestowed upon me may be a discourtesy to the artworks, I kept dragging the scroll bar to jump to the points I wanted to watch. Then, at a certain moment, I got used to the sensation of scrolling, and even managed to delude myself into thinking that I was controlling time. Anywhere other than inside the black box of a cinema, where there’s no choice but to watch the screen, I end up becoming an overly distracted viewer. And, on another hand, the power of the artist to rupture defined temporality also caused me a certain feeling of discomfort. It was a sense of burden, deriving from the fact that I alone was responsible for properly appreciating the works. I wasn’t entirely glad to find this personal flow of time completely at the will of my fingertips.

But this feeling also brought new experiences: despite the ironic autonomy, I also encountered works that made me obediently follow the intentions of their creators. It was a kind of declaration of surrender. “I hereby return the power of the scroll bar.” Once was not enough, and I found myself viewing these works several times. I saw this as a new way of discovering the unique power of works—a power upon which institutions could not encroach. In this way, on-line platforms can become an option for some citizens, in conditions created by some circumstances. Yet at the same time, this also means that the on-line “migration” by art museums should not be just an easy reaction to the pandemic. Because alternative approaches are no more than attempts by the art museum system to escape the relationship of tension that exists between artists and viewers. Clearly, when art museums imagine this future, it remains a fact that their top priority is including the things they have previously omitted and excluded.

In this sense, the fact that an exhibition of works posthumously donated from the collection of a chaebol industrialist is proving an enduring hit even amid the pandemic is deeply meaningful. Reservations for viewings closed a month ago, revealing new and previously hidden Korean art lovers. But, faced with this ironic scene, I want to ask: If young children don’t go to contemporary art museum, will museums go under? Of course they won’t. Will museums go under if they show no works by foreign artists? Not completely. Will art museums go under without Lee Kun-hee? Perhaps they will. These questions and answers will have to be re-written by the art museums that we must now newly imagine. Who, here and now, are we, and what are our shared experiences? Who do we have to be, and what do they have to be?

돌봄으로 공유하기, 취약성의 네트워크

Sharing Care, Networks of Vulnerability

낭독: 다나카 코키
텍스트: 「돌봄을 공유하기, 취약성의 네트워크」, 『다나카 고키: 기록으로 돌아보기』, 2020, p. 355-360 부분 발췌



스크립트:



가족의 세계와 직업의 세계와의 사이에 그어진 경계는 손댈 수 없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역사 속에서 형성되어 온 것이다. 이 경계는 여성들과 남성들을 성별로 구분해, 남성에게 인생의 진로와 희망을 선택할 여지를 부여하고, 여성들에게는 가정에서의 생활을 유지하는 것 이외의 선택의 여지를 부여하지 않았다.¹

하지만 타인의 가정 사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당사자성의 문제에 저촉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당신의 가족은 나의 가족이 아니니까. 게다가 내게는 아이가 없다. 타자를 돌보는 활동, 간호² 등을 포함한 보다 일반적인 활동을 ‘돌봄 노동 ’이라고 부른다고 해도, 나의 부모는 아직 수발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다. 내게 있어 당사자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은 장래에 대한 예측으로서의 육아나 간호일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당사자가 아닌 사람의 의견은 그렇게도 무효한 것일까.



당신의 가정과 특정한 관계가 없기 때문에, 즉 이해관계가 전혀 없으므로,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당신의 가족에 대한 의견을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식사를 준비하기. 아이 돌보기. 생활에 필요한 서류를 작성하기. 청소하기. 집 안의 고장 난 물건을 고치기. 일용품을 구매하기. 부모님을 모시기. 빨래하기. 반상회 안내문을 돌리기. 쓰레기를 내놓기. 매일의 잡일. 집안일도 하나의 노동이다. 그들은 대부분이 타자를 돌보기 위한 돌봄 노동이다. 가정 안에서 그러한 가사, 돌봄 노동은 어떻게 분담되고 있는가. 당신은 어느 정도 가족과 그러한 노동을 분담하고 있는가. 나는 아내와 그러한 노동을 얼마나 분담하고 있는가.



타자에게 의존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은, 직업 세계에서의 프로페셔널리즘, 자율적이고 강한 개인의 존재 방식을 비평한다. 우리들은 원래 약한 개인이다. 예를 들어 불안정한 노동환경에 의해 그 사실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 내에서 돌봄 노동을 분담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직장과 일 관계자들 그리고 사회 안에서 이해를 분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주제는 개인주의적인 예술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경한다. 약한 아티스트를 떠올려보자. 여러가지 기술을 갖춘 기업가로서의 강한 아티스트가 아니라 기술이 없는 조정자의 역할(코디네이터)로서의 약한 아티스트를 생각해 본다. 약한 개인은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필요한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타인의 도움, 협력을 조정하는 기술일 것이다.

저자성(authorship)의 문제(‘저자의 죽음’ 이후의 ‘저자’는 무엇인가)에 관해서도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협업에 기반한 제작에서는 저자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가 문제가 된다. 물론 제작 현장에서는 책임자가 필요하다. 아티스트는 조정자인 동시에 책임자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조정해 사태의 책임을 진다. 하지만 작업이 이루어 낸 창조적 성과를 아티스트 개인에게 모두 귀속시키는 것은 어떠한가. 그렇게 하지 않고, 작업을 여러 개인들, 수많은 창조성이 모인 상호 침투형의 네트워크로 인식하면 어떨까. 취약성의 네트워크는 강한 작가에 의한 창조성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약한 개인들에 의한 협력적인 창조성을 지향한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작업 제작이라는 노동 현장을, 각각의 가정 사정까지 배려하는 상호부조의 체계를 갖춘, 또 다른 협업의 사회로 만들어갈 것이다.

1, Fabienne Brugere, 『L ’ethique du care 』의 일본어판, 『배려의 윤리 :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론』, 하쿠스이샤, 2014 년, 97 쪽.
2, 일본어 개호(介護)는 병자를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고령자를 모시고 수발을 드는 일을 의미­—역주.

Rading: Koki Tanaka
Text: “Sharing Care, Networks of Vulnerability”, Koki Tanaka: Reflective Notes (Recent Writings), 2020, p. 349-353 partial excerpt.



Script:



Barriers between the family and professional world, mistakenly regarded as intangible, are the result of historical construction. Not only do these barriers subject women to men through reference to sexual difference, but they also allow men to choose a path, a journey, and an aspiration in life, while women have no choice but to preserve a domestic order imposed on them.¹

But speaking out about other people’s domestic situations might conflict with issues of first person–ness [tōjishasei]. First, because your family is not mine—plus I don’t have children. In general terms, “care work” refers to all acts of caring for others (including caregiving). But, for instance, my parents still don’t need me to look after them. The only way to obtain my own first person–ness is to grasp childcare or caregiving as a future, prospective thing for me. But is the opinion of someone who doesn’t share that experience really so invalid in the first place?



Even someone who does not share your experience can speak on your family precisely as someone with no relation to it. Making meals, looking after the kids, filling out all the essential paperwork for living, cleaning up, fixing things around the house, shopping for necessities, caring for parents, doing the laundry, passing along community bulletins, taking out the garbage—these daily chores and housework are also a form of labor. Almost all of them involve the care work of looking after someone else. How is such housework or care work divided/shared in your home? How much do you do your part for your family? How much am I doing my part for my partner?



A mode of human being that depends on others critiques the professionalism of the business world; it critiques strong, autonomous individualism. We are, after all, vulnerable individuals—which you would also recognize from precarious work environments. Even if you were able to share care work in the home, the more important thing might be sharing understanding at the workplace, among coworkers, and in society.



I bet this idea would fundamentally alter the individualistic worldview of art. Visualize a weak artist. Try thinking not of the strong entrepreneur artist equipped with multiple skills, but a weak coordinator artist with no skills. A vulnerable individual needs help from others. If there is any single skill they can’t do without, it’s probably the skill to coordinate the help, the cooperation of others. A weak artist might also be able to offer an alternate view on issues of authorship. (Who is an author after the “death of the author”?) We make an issue out of how to identify the author in a collaborative project. Of course, there needs to be someone who is responsible for organizing the work. So the artist is both coordinator and manager; they coordinate everyone and take charge of the situation. But could we really credit the creative results of the project entirely to the individual artist? How about instead appreciating a single project as an interpenetrative network comprising multiple individuals, multiple creativities? A network of vulnerability aims for a collaborative creativity of multiple weak individuals—a creativity unattainable by a single strong author. And that would eventually lead to us remaking the workplace of artistic production into an alternate, collaborative society with a mutual aid system that goes so far as to care for each person’s domestic situation as well.

1. Fabienne Brugère, Care Ethics: The Introduction of Care as a Political Category, trans. Armelle Chrétien, Olivia Cooper-Hadjian, and Brian Heffernan, Leuven: Peeters Publishers, 2019, 74–75.

유토피아적 추출

Utopian Extraction

〈유토피아적 추출〉은 사대강 사업으로 생성된 거대한 모래산, 새만금 간척 사업의 토석으로 사라진 해창석산 등을 배회하며 남긴 언메이크랩의 기록이다. 언메이크랩은 인간의 목적에 따라 추출, 변형되면서 결국 엇비슷한 모습을 갖게 된 현장에서 인간이 자연과 이웃해 살고자 하는 욕망의 이중성을 가시화한다. 이 낭독이 포함된 영상 작업 〈유토피아적 추출〉은 현재 백남준아트센터 기획전 〈오픈 코드. 공유지 연결망〉 (2021.7.1.-10.24.)에 전시 중이다.

언메이크랩, 〈유토피아적 추출〉 (2020) 중 일부 발췌, 백남준아트센터 소장품

텍스트/목소리: 최빛나

스크립트

Utopian Extraction is a recording produced while the artists of Unmake Lab were wandering around the vast sand mountain generated by the Four Major Rivers Project and the Saemangeum Haechangseoksan excavated to supply soil and stones for the land reclamation. Unmake Lab reveals the duplicity of human desire to live as part of nature where the fields eventually have a similar appearance as they are extracted and transformed according to human purpose. The video work Utopian Extraction, which includes this narration is on view at Nam June Paik Art Center's exhibition Open Codes. Networked Commons (Jul 1 - Oct 24, 2021).

Excerpt from Utopian Extraction (2020) by Unmake Lab, Nam June Paik Art Center Collection

Text/Voice: Binna Choi

Script

물구나무종 선언

The Manifesto of Handstanderus

염지혜의 〈물구나무종 선언〉 낭독은 재난 X가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새로운 사유를 시도하고자 물구나무서기를 수행하는 ‘물구나무종’, 즉 새로운 인간종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식물을 통해 우리의 사유를 재고해보고자 새로 난 잎사귀처럼 부드럽게 ‘물구나무종 선언’을 제안한다. 이 낭독이 포함된 영상 작품은 현재 아르코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횡단하는 물질의 세계〉전에 전시되어 있다.

염지혜는 영상 언어가 지닌 가능성을 탐구하며 현상 이면에 작동하는 힘의 근원을 밝히는 도구로 활용하는 작업을 진행해오고 있다

원작 〈검은 태양 X: 캐스퍼, 마녀, 그리고 물구나무종〉 중 일부 발췌
텍스트: 염지혜
피아노/목소리: 이용석

〈물구나무종 선언〉 스크립트

Ji Hye Yeom’s The Manifesto of Handstanderus tells the story of a new human species called Handstanderus, who handstands for a different thinking process to live in a world ravaged by disaster X. Like a newly-sprouted leaf, the work gently proposes The Manifesto of Handstanderus to reconsider the way one thinks through plants in particular. Video work in which this audio book is excerpted from is currently exhibited at an exhibition Nothing Makes Itself at ARKO Art Center.

Ji Hye Yeom has used the potential of visual language a tool to uncover the source of the power behind phenomenon surrounding our society.

Exerpt from original work Black Sun X: Casper, Witch, and Handstanderus

Text: Ji Hye Yeom
Piano/Voice: Yongsuk Lee

The Manifesto of Handstanderus Script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보지 않는 것이다.

It is not the invisible; it is unseen.

이 낭독은 텔레톤에서 미술 비평가 콘노 유키와 함께 〈아트선재센터: 이웃, 경계, 언어〉 파트의 패널로 참여한 시인 오은이 텔레톤 촬영을 마치고 자신의 시집 『호텔 타셀의 돼지들』(2009)에 수록된 「디아스포라」의 한 구절을 읽으며 나눈 목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집에 탁, 들어왔을 때 불이 탁, 켜져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꿈은 야무진 게 아니라 추한 거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피식) 후유, 밥이나 챙겨 먹어야겠어요 실은 하루 종일 얼마나 배고픈 줄 몰라요 (피식) 피클이랑 찬밥을 사발에 넣고 비빌 겁니다 고추장도 좀 넣고요 한번 들어 볼래요? 맛이 괜찮거든요 (피식) 기자 양반, 근데 아리랑이 뭔 뜻인가요? 엊저녁부터 저 말이 머릿속에 딱 붙어 떠나지를 않더라고요 (피식) 뭐요, 확실치 않다고요? 그럼 내 처지랑 별반 다를 게 없잖아요 (피식) 그냥 밥이나 먹으렵니다 허, 싱겁네"

For this reading, Oh Eun was recorded reading a passage from “Diaspora,” a poem in his collection The Pigs of Hotel Tassel (2009), after the filming of a telethon where he took part together with art critic Yuki Konno on a panel titled “Art Sonje Center: Neighbors, Borders and Languages.”

“…How wonderful it would be if the lights came right on right when you came home. Who said that dreams were not firm but squalid? (chuckle) Phew, I guess I’d better have something to eat. I’ve been so hungry all day. (chuckle) I’m going to put some pickles and cold rice in a bowl and mix it up. Put some red pepper sauce in there too. Want to try some? It’s not bad. (chuckle) But I have to ask, Mr. Reporter, what does “Arirang” mean? That word has been stuck in my head since last night. (chuckle) What, you’re not sure? That means you’re in the same boat as me. / (chuckle) I’m just going to have some food. Hmm, it’s kind of bland.”

넘치는 사랑으로

Overflowing Love

창작자: 서울익스프레스 (아티스트 콜렉티브)
목소리: 장선 (배우)
음악: Be My Baby (Linda Ronstadt), Be My Baby (Lowland Hum)
퍼포먼스 정보

Script: Seoul Express (artist collective)
Reading: Jang Sun (actress)
Music: Be My Baby (Linda Ronstadt), Be My Baby (Lowland Hum)
Performance Information